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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나보다 나라가 먼저라는 조봉암(曺奉岩)
전병일 본지 회장
[2021-09-14 오전 11:19:00]
 
 
 

나보다는 나라가 먼저라는 조봉암 그는 과연 누구일까?

독립운동, 노동운동, 반독재운동을 하다 사형수로 생을 마감한 기고만장한 불운의 정치인 죽산 조봉암 선생, 6.25전쟁 중 이승만 정부는 한강철교를 폭파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떠났지만 조봉암은 국회 중요문서를 안전한 장소로 옮기는 투철한 애국정신을 보이기도. 731일 망우산 묘역에서 62주기를 맞은 진보정치의 1세대 거두 죽산(竹山) 조봉암(曺奉岩)을 조명해본다.

 

대한민국 정치사에서 진보정치의 원조하면 단연 죽산 조봉암 선생이라 해도 어느 누구도 부정하지 않을 것이다. 죽산 선생은 1898925일 인천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강화에 있는 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강화군청 급사, 독립운동 조선공산당조직 농민노동자운동 해방 후 제헌국회의원과 초대농림부장관 두 차례의 대통령후보 진보당창당 반독재운동으로 정치 활동의 전열을 정비하려 하였으나 나는 계급독재 사상을 배격하고 공산당 독재도, 자본가와 부패분자의 독재도 강고히 반대하며 민주주의 체제를 확립하면서 복지사회를 건설하겠다는 진보당 결당대회사를 문제 삼은 진보당사건으로 체포되어 1959731일 오전 112분 사형대에 앉아 내가 죄가 있다면 이승만 박사의 독재노선과 싸우다 졌으니 패자는 승자로부터 흔히 당 할 수도 있는 일. 이런 문제로 인하여 나와 같은 희생양은 내가 마지막이 되길 간절히 바란다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사형을 당한 불운의 정치인이었으나 죽산은 사형장의 이슬로 이 세상에서 사라진지 52년만인 2011120일 무죄선고를 받고 세상을 떠 난지 62년이 지났지만 진보정치인들의 정신적 지도자로 영원히 빛나고 있다. 죽산은 민주주의를 설계하고 민주제도를 건설하려다 독재노선에 패하여 사형장의 이슬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가신지 60여년이 자난 오늘의 우리정치 현장에서는 권력과 싸우다 사라진 죽산 조봉암과 같은 유사한 일이 없기를 모든 국민은 바라고 있을 것이다.

 

공산당 국제연합기구에서 활동하면서 중국과 모스크바를 오가다 무정부주의에서 사회주의자로 변신. 개혁과 진보의 선봉장에서 독립운동에 투신 젊은 10년을 감옥에서 보내기도 하였고 해방 후 조선공산당이 북의 김일성과 동질성이 있다 하여 탈당했다.

 

죽산 선생이 가신지 벌써 62년 과연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1898925일 인천 강화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공립보통학교와 농업보습학교를 졸업하고 191517세의 나이로 강화군청에서 급사로 일을 하다 큰 뜻을 품고 상경하여 기독청년회 중학부에서 1년의 과정을 마치고 191920대 초반에 3.1운동 만세시위에 참여를 하여 서대문형무소에서 1년간 복역을 한 후 1920년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중앙대학에서 1년간 정치학을 공부 한 것이 시발이 되어 정치인으로서 첫 걸음이 되었다.

 

그는 20대 초반의 시기에 무정부주의에 섭취되어 비밀결사조직에 가담을 하였으나 곧바로 회의를 느끼고 사회주의 이념으로 기울게 되었으며, 1922년 독립운동을 하기 위해 귀국을 하여 각종 청년단에서 활동을 하던 중 1919년 레닌의 주도아래 소련공산과 독일민주당좌파를 중심으로 모스크바에서 창립된 공산주의 국제연합으로부터 지령을 받고 소련에서 개최된 국제공산주의 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가를 하게 되었고, 이듬해인 1923년 모스크바의 동방 공산대학 속성과에 입학을 하여 수료를 한 후 조선공산당 청년동맹과 조선공산당을 조직하라는 임무를 부여받고 국내로 잠입을 하여 청년 조봉암의 공산주의 운동이 시작을 한 것이다.

 

19254월에는 노동자 농민운동의 총집결체인 조선노동총연맹과 조선공산당, 고려 공산청년 동맹 등을 결성하는데 핵심역할을 하였고, 19262월에는 상해에 조선공산당 해외지부를 설치하였고, 같은 해 조선공산당 만주총국을 결성하여 책임비서가 되면서 조선공산주의 운동의 절정기를 맞이하면서 같은 해 7월에는 공산주의 국제연합기구의 극동국 조선위원으로 임명이 되면서 청년 조봉암은 국제적인 공산주의운동인물로 인정을 받기도 했다.

 

19274월에는 대한제국 기에 민권운동에 앞장서고 항일투쟁과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요직을 두루 거친 우익정치인 이동녕 선생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서 내무와 재무부장 등 국무위원으로 활동을 하신 조완구 선생 등 독립운동가 24명과 함께 상해에서 한국독립당 촉성회를 조직하고 집행위원으로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같은 해 5월에는 중국공산당 한인 지부를 조직, 책임자 역할을 맡기도 했으며 6월에는 국제적색노동조합 주최의 범태평양 노동자대회에서 조선대표로 참석해 조선노동운동의 방침을 밝히기도 하고 192910월 그의 나이 30대에 진입을 하면서 조선독립운동자 동맹을 조직. 독립정신을 만방에 알리는데 앞장서기도 했으며, 193112월 한인 반제동맹을 결성하여 독립운동을 하다 193211월 상해에서 일본경찰에 체포되어 신의주형무소에서 7년간 복역을 하고 출옥을 한 후 고향 인천에서 독립지하운동을 하다 19451월 다시 검거되었으나 해방을 맞이하면서 석방이 되었다.

 

해방 후 조선공산당을 탈당 제헌국회의원과 초대농림부장관 국회부의장을 역임하고 대통령후보 등을 지낸 후 반독재운동을 하면서 시대에 맞도록 제도를 만들고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노력에 의한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고 행복스럽게 잘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자고 진보당을 창당 한 것이 숙청의 빌미가 되어 2310번의 서울교도소 수번을 달고 나에게 죄가 있다면 모두가 고르게 행복한 삶을 누리는 정치를 역설 한 것 밖에 없다고 외치면서 사형장의 오라리에 매달려 생을 마감 했다.

 

해방을 맞이한 후 고향인천에서 치안 유지회 와 건국준비위원회 노동조합실업자대책위원회 등을 조직 활동하면서 조선공산당 간부 겸 민주주의 민주전선 인천지구위원장에 취임을 하였으나 박헌영의 공산당노선이 김일성의 노선과 동질성이 있다고 하여 1946년 조선공산당을 탈당하면서 박헌영에 공개서한을 보내고 반 좌익 성향의 정치노선을 견지하기 시작 했다. 죽산선생은 1948년 제헌국회의원 선거에 인천2선거구에서 4명이 출마를 하여 38%에 해당하는 17.620표를 얻어 당당히 당선이 되었고 대한민국정부수립과 동시에 초대농림부 장관으로 취임을 한 후 국민80%인 농민의 지위향상을 위하고 소작인들에게는 경작지 분배 와 농민들에게 유리한 법안과 정책을 펼치면서 지주들에게만 유리한 농지개혁 법안을 내놓은 한민당과 고군분투 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6개월만인 1949222일 사임을 하였다.

 

19506. 25.전쟁발발 직전 530일 국가기강이 어수선한 분위기에 속에서 제2대 국회의원선거에서 죽산조봉암 선생은 인천3선거구에서 12명이 출마를 하였으나 14.095표로 무려42.75%로 당선이 되었고 재적의원 210명중 이승만을 반대하는 무수속이 대거당선이 되자 국회에서의 현행 간선제로서는 이승만대통령의 당선이 가망이 없게 되자. 195111월 대통령 직선제 개헌안을 국회에 발췌개헌안을 제출 하고 12월에 자유당을 창당 한 후 19521월 개헌안을 표결 하였으나 부결 되어 임시수도인 부산에서전쟁이 한창인 525일 계엄령을 선포하고 출근하든 국회의원 47명이 타고 있던 버스를 통째 연행하여 헌병대로 끌고 가는 정치파동을 자행하고 74일 밤 경찰의 삼엄한 경비와 공포분위기속에서 결국은 직선제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726일 제2대대통령후보등록마감을 한 후 9일간의 선거운동기간으로 85일 대통령 선거를 실시 한 것이다. 결과는 예상한 대로 였으나 자유당의 이승만 후보는 5.238.769표로 당선이 되었으나 무소속의 조봉암 후보가 온갖 박해와 선거운동의 방해 속에서도 797.504표라는 지지를 받게 되자 권력으로부터 경계대상의 인물로 등장을 한 것이다. 1954520일 제3대민의원선거결과 집권 자유당은 다수는 차지를 하였으나 개헌정족수를 확보 하는 것에는 실패 하였다. 그러나 권력을 내 놓아야 하는 위협을 느낀 자유당과 이승만 정권은 19541127일 초대대통령에 한해서는 영구집권을 위한 중임제한을 철폐하는 개헌안을 표결 하였으나 재적의원203명중 찬성135 반대 60 기권 7의 결과로 1표가 모자라 부결이 선언 되었으나 자유당은 이틀 후인 29일 모자라는 한사람을 사사오입이란 기묘한 논리를 적용시켜 개헌안의 가결을 선포했다.

 

독립운동가로서 정치가로서 평생을 살아온 죽산 조봉암은 그는 사형당하기 3년 전 자신의 정치이상을 소리높이 외쳤으며 마지막순간에도 다만 나의 죽음이 헛되지 않고 이 나라 민주발전에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고 했다. 1956년 제3대대통령선거 민주당의 못 살겠다 갈아보자갈아봤자 더 못 산다는 자유당 갈지 못하면 살수 없다라는 진보당 조봉암 의 선거구호는 우리역사에 기리 남을 구절들이였다.

 

사사오입개헌 선포이후 1955년 정치세력들은 뭉치기 시작을 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1955년 반 이승만 세력을 결집하기 위하여 호헌동지회를 결성해 신당창당을 추진하였고 민국당을 중심으로 하고 자유당 소장파의원들이 합류를 하면서 조봉암 에게도 참여를 권유하고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으나 반대세력이 있어 무산되었다 호헌동지회 세력은 918일 창당 발기인대회를 열고 민주당을 출범시켰으나 조봉암 세력을 두러 워 한 민주당의 일부반대로 죽 산은 독자노선을 선택 할 수밖에 없었다. 12월 죽산 조봉암은 서상일등과 규합을 하여 진보당을 결성하고 죽음의 날을 앞당기기 시작을 했다. 그는 바로 이 나라 진보정치의 원조1세대가 된 것이다. “그 시대에 맞고 그 사회에 맞고 그 인정에 맞도록 제도를 만들고 정책을 고침으로서 사람이 사람을 착취하는 일을 없애고 또 인간의 존엄성을 무시하는 일을 없애고 모든 사람의 자유가 완전히 보장되고 응분의 노력과 사회적 보장에 의해서 다 같이 평화롭게 잘 살 수 있는 세상 이것을 가리켜 한국의 진보주의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것은 진보당 창당대회 개회사일부다.

 

50년대 중반 우리나라의 가장 심각한 문제는 농촌의 빈곤과 도시의 실업자 대책 이였지만 권력은 부패로 만연하고 있었다. 1956515일 실시한 대통령선거에 그의 진보당은 우리는 이대로 살아 갈수 없다 혁신대통령 조봉암을 후보로 선출 하고 갈지 못하면 살수 없다 라 는구호를 외치며 극우와 극좌가 대립하고 부패가 만연한 사회대신 동포가 서로 화합하는 민주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고 공약을 내세워 2.163.808표라는 30%의 득표로 이승만대통령의 강력한 정적으로 자리 매김을 하면서 죽음을 채찍질 한 것이다.

 

드디어 그의 앞에 죽음의 운명이 다가오기 시작을 했다. 1958년 새해가 시작이 되자 112일진보당당수 조봉암을 필두로 검거령이 내려 간부들에게 까지 검거가 시작이 되었고 그는 간첩혐의로 구속이 되어 1심에서 간첩혐의는 무죄 국가보안법혐의로 5년의 유죄가 선고 되었으나 검찰의 항소와 압박에 서울고등법원에서 간첩죄를 다시 적용 사형이 선고되고 1959730일 대법원은사형을 확정하고 당시 홍모 법무부 장관은 다음날인 31일 오전112분 가족들은 밖에서 면회를 기다리고 있던 중 사형이 집행 되고 사법살인이라는 유행어를 남기고 그의 일생은 마감을 한 것이다. 그는 진보정치의 원조로서 대통령과 농림부 장관으로 조봉암과 이승만은 정치적 동지로 출발을 했으나 적으로 끝을 맺게 된 것이다.

 

죽산의 죽음 60여년이 지난 오늘의 정치 마당에서는 이런 유사한 불행한 사건이 재발 하지 않겠지만 만약에 재발 한다면 국가의 불행이요 국민의 불행이라 할 것이다. 민주주의를 설계하고 민주제도를 건설 하면서 공정과 평등의 원칙을 부르짖은 죽산 조봉암 부패한 독재 권력에 패하여 사형장의 올가미에 매달려 생을 마감 한지 올해로 62주기를 기념하기 위하여 망우산 그의 묘소를 찿은 200여명의 추모객들은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죽산의 애환을 달래고 있었다.

 

봉암 그는 한국공산당의 원조 이였지만 빨갱이는 아니 였으며 그의 투철한 국가관과 애국정신은 그를 빨갱이라고 부르는 세력보다 높이 평가를 받아야 한다. 이승만 정권은 권력과 목숨을 부지하기 위하여 한강 철교를 폭파하고 부산으로 피난을 갔을 때 죽산은 국회에 남아 중요문서와 자료들을 안전한 장소로 피난을 시키는 숭고한 애국정신을 보이기도 했다. 빼앗긴 권력 다시 찿기 위하고 빼앗은 권력 수호하기 위하여 고군분투 하는 작금의 정치 세력들은 죽산 조봉암의 정신을 알고나 있는지 묻고 싶기도 하다.

남양주신문사(nyji@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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